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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향기/네티즌이 알기쉬운 기독교

17. 로마의 평화와 그리스도의 평화

네티즌을 위한 알기 쉬운 기독교 (17) - 로마의 평화와 그리스도의 평화

 

로마의 평화와 그리스도의 평화
예수님을 평화의 왕이라고 하는데, ‘로마의 평화’와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왕이 되신 적이 없는데, 왜 ‘만왕의 왕’이라고 부릅니까?

 


로마의 평화

로마의 평화’라는 말은 ‘아우구스투스의 평화’가 변형된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로마의 원로원은 ‘평화재단’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그 재단을 당시 황제의 이름을 따서 ‘아우구스투스 평화재단’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때부터 ‘Pax Augusta(아우구스투스의 평화)’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철학자 세네카가 이 개념을 ‘Pax Romana(로마의 평화)’로 바꿔서 불렀다고 합니다.

이 Pax Romana는 로마의 군사통치와 긴밀하게 연결된 개념입니다. 당시 로마인들은 주피터신의 섭리에 의해 선택된 백성이라는 선민의식과 주피터로부터 무제한적인 영토를 수여받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의식은 로마로 하여금 끝없는 지배욕에 사로잡히게 하였고, 따라서 로마는 세력확장을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로마가 사용하던 동전에는 전쟁의 신 마르스(Mars)와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Victoria)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동전의 한쪽 면에는 마르스의 모습과 ‘Mars Victor’(승리자 마르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고, 다른 면에는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가 승리의 월계관을 아우구스투스의 머리 위에 씌워 주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또 다른 종류의 동전에는 코모두스 황제에게 월계관을 걸어 주는 빅토리아의 모습과 함께 그 황제의 발 밑에는 땅에 엎드린 채 포박되어 있는 포로의 모습, 그리고 황제를 태운 말이 왼쪽 발굽으로 포로를 짓밟고 있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이 동전의 그림이 상징하는 것처럼 ‘로마의 평화’는 전쟁의 승리를 통해 쟁취하는 무장된 평화였습니다. 그 평화는 로마인에게는 승리의 평화지만, 피정복지 백성의 입장에서 볼 때는 굴욕의 평화요, 피로 물든 평화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팍스 로마나’는 위장평화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 ‘로마의 평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로마 당국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로마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통치행위였습니다. 요세푸스라는 초기 역사가에 의하면,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거행된 십자가 처형은 로마가 반란지역을 평정하기 위해 도입한 처형제도였다고 합니다. 즉, 정치적 반란자와 선동자들에게만 십자가 처형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두 명의 강도들 사이에서 처형된 것도 이 사건의 정치적 성격을 조명해 줍니다. ‘강도’라는 명칭은 흔히 당시 정치적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을 지칭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주도했다는 사실과 예수님의 머리 위에 적힌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 역시 이 사건의 정치적 성격을 잘 증명해 줍니다.

결국 로마는 자신들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 평화에 걸림돌이 되는 예수를 평화의 이름으로 합법적으로 제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

이렇게 평화의 이름으로 폭력의 희생물이 된 예수님이 역설적으로 화해와 평화를 실현시켰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팍스 로마나’처럼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고 더 이상 반항할 수 없는 상태에서 조성되는 위장된 평화, 거짓 평화가 아니라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용서와 화해를 통해 폭력과 보복의 악순환을 끊는 데서 오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그분은 유대사람과 이방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엡2:14-16) “하나님께서는…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기쁘게 자기와 화해시키셨습니다.”(골1:20)

그리스도께서 중재자가 되셔서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의 관계를 정상으로 복원시켰다는 뜻입니다.

헬라인들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남북한 관계를 통해 잘 알 수 있듯이 군사적 평화는 상호 신뢰와 굳은 실천의지를 담보로 해서 비로소 유지될 수 있는 평화요, 팽팽한 힘의 균형을 통해서 유지될 수 있는 평화입니다.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한에서 유지될 수 있는 조건적인 평화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평화는 어떤 합의나 조약이나 선언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화해와 평화의 주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하다고 성서는 증언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평화를 ‘샬롬’이라고 부릅니다. 그 샬롬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복합적인 뜻을 지니고 있는 단어입니다. 평화, 자유, 평등, 마음의 평안, 안전, 복지, 행운, 정의, 온전함, 올바름, 치유,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 등의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는 단어가 바로 샬롬입니다.

따라서 그 샬롬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요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참된 평화이며, 인류가 추구해야 할 지상의 가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왕의 왕 예수?

이처럼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온전한 평화를 이루신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으로 부각시킨 것은 기독교가 유럽 일대를 통치하던 중세기의 산물입니다. 중세 기독교는 교회와 교황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리스도를 왕 중의 왕 또는 만왕의 왕으로 부각시켰고, 교황은 그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제왕의 자리에 앉아서 호령한 적이 없는 분입니다. 오히려 낮고 천한 종의 모습으로 사심으로 만왕의 왕이 되신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권력으로 통치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는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세상의 통치자가 되신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부요한 삶을 사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들과 더불어 사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는 정복자 메시아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패배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만민의 구세주가 되신 분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서나 평화의 일꾼(peace-maker)이 되어야 합니다.

강영선 한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