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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향기/네티즌이 알기쉬운 기독교

4. 성공회는 가톨릭인가? 개신교인가?

네티즌을 위한 알기 쉬운 기독교 (4) - 성공회는 가톨릭인가? 개신교인가?


성공회는 가톨릭인가? 개신교인가?
 - 성공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 성공회는 미사를 드리고 사제를 신부라 부르는데 그렇다면 가톨릭의 일파입니까?
 - 성공회는 영국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성공회 탄생의 배경


성공회(聖公會)는 기독교의 주요 교단 중 하나입니다(영어로는 The Anglican Communion, Anglican Church, Episcopal Church 또는 Holy Catholic Church라고 하는데 우리말의 ‘성공회’는 Holy Catholic Church를 직역한 것).

이것은 성공회가 가톨릭교회(Catholic Church)로부터 독립하면서 Holy(聖)를 덧붙인 데서 유래됩니다.

성공회는 16세기 종교개혁의 물결 속에서 영국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로마 교황의 통치를 거부하고 가톨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기 때문에 분명히 개신교에 속합니다. 성공회의 신학은 개신교에 가깝지만 교회의 정치제도, 예배의식, 성례전 등은 가톨릭과 흡사하기 때문에 종종 가톨릭의 일파로 오해받는 것입니다.

성공회의 시작은 로마 교황의 전권통치로부터 독립하고자 했던 영국 국왕과 영국 교회의 정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당시 영국 국왕 헨리 8세는 정치적 수완이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보수적이어서 종교개혁 초기에는 독일과 스위스에서 일어나는 교회개혁 운동을 반대하여 루터의 저서가 영국 땅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고, 개혁자들의 성례관을 반대했습니다. 1521년 ‘일곱 성례를 주장함(Assertion of Seven Sacraments)’이라는 책을 출판해 당시 교황 레오 1세로부터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정생활은 매우 불행했습니다. 그는 당시의 강대국 에스파냐의 공주였던 캐더린과 정략 결혼해 6남매를 낳았으나 결국 다 죽고 후에 ‘피의 여왕’이 된 메리만 남았습니다. 그는 왕위 계승을 위해 왕궁에서 일하던 엔볼린과 결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캐더린과의 이혼을 교황청에 요청했으나 교황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1533년 헨리 8세는 교황의 허락 없이 캐더린과 이혼을 선언하고 엔볼린과 결혼했습니다. 이에 크게 분노한 교황은 헨리를 파문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헨리는 로마 가톨릭과의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이로 인해 영국 국교회로서의 성공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영국 국교회로 탄생한 성공회

성공회는 외형적으로 보기에는 이처럼 정치적 이유로 시작되었으나 내면적으로는 16세기 유럽 각지를 풍미했던 종교개혁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에라스무스와 존 콜레트 같은 지도자들의 영향 아래 영국의 개혁자들은 그리스도교적 문예부흥을 시도했으며, 로마 교황의 가톨릭 통치로부터 독립해 영국적 가톨릭 통치로의 전환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들로 인해 성공회는 과거의 역사와 전통을 파괴하지 않고 계승하면서 교회생활 안에 많은 종교개혁적인 요소를 내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공회의 정신을 중용(Via Media)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성공회의 탄생 배경에는 신학적인 이유와 정치적인 이유가 맞물려 있었습니다.

로마 가톨릭과 결별 후 영국은 교황청에 대한 납세를 금지했고, 토마스 크랜머를 영국교회의 대표격인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으며, 교황청에 대한 모든 서약과 교황청이 발급한 모든 면허장의 무효화를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1534년 11월 3일에 영국 국회는 헨리와 그의 후계자(국왕)가 영국교회의 머리가 되는 ‘수장령(首長令·Supremacy Act)’을 통과시켰는데, 이로 인해 사실상 영국 국왕이 영국 교회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고, 이로 인해 성공회는 영국 국교회가 되었습니다.

성공회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결별해 영국 국교회가 된 후에도 영국 땅에서는 국왕에 따라 각 교회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정책을 추진하게 됩니다. 헨리 8세 때는 영국 땅에 살고 있던 가톨릭 신도들과 개신교(칼빈파 장로교) 신도들이 왕의 명령에 의하여 영국교회, 즉 성공회로 개종하도록 강요당했고, 이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처형됐으며, 모든 수도원과 교회의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헨리 8세가 1547년에 사망하자 에드워드가 여섯 살 나이로 즉위했고, 소머셋 공이 섭정했는데, 소머셋 공은 개신교를 옹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종교적 혼란이 가중되자 1549년 국회에서 ‘일치령’을 결의했습니다. 모든 영국인은 하나의 신앙을 갖도록 법을 제정한 것입니다.

그 후 에드워드는 6년 만에 병사했고, 1555년 헨리의 맏딸 메리가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메리는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던 캐더린의 딸이었고, 부당하게 이혼 당한 어머니의 한을 품은 여인이었습니다. 결국 메리는 성공회를 금지하고 가톨릭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함으로써 영국사회는 큰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많은 개신교인과 성공회 신자들을 처형했는데 메리가 4년 동안 집권하고 1558년에 죽을 때까지 화형장에 하루도 불길이 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Bloody Mary(피의 여왕 메리)’란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녀가 죽자 엘리자베스 여왕(헨리 8세와 엔볼린의 딸)이 즉위했는데 그녀는 독실한 성공회 신도였기 때문에 1559년에 성공회를 영국의 유일한 종교로 선언했고, 가톨릭과 개신교를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수많은 가톨릭과 개신교 신자들이 학살당했습니다. 이러한 혼란과 박해기에 신앙의 지조를 지킨 개신교인들을 가리켜 청교도(Puritan)라 부릅니다.

 

강영선 한신대 교수

 

기사원문 ;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5404522&cp=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