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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향기/네티즌이 알기쉬운 기독교

45. 시한부 종말론의 실체는 무엇인가(2)

네티즌을 위한 알기 쉬운 기독교 (45)

입력 2012-07-19 17:53

 
시한부 종말론의 실체는 무엇인가② 
 
■ 2012년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설이 유포되는데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 1992∼93년에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시한부 종말론’ 사건은 어떠한 근거에서 나온 것인지 궁금합니다. 
 
종말 날짜·시간 못박는 것은 비성서적


<지난 주 이어 계속>  

셋째, 잘못된 성서 해석 때문입니다. 문자주의적, 알레고리적, 또는 ‘영해(靈解)’라는 미명의 지극히 주관적이고 아전인수격인 성서 해석은 사이비 종말론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됩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성서에 나오는 상징을 문자주의적으로 받아들여 여러 억지 해석을 합니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666’ ‘144,000명’ ‘7년 대환란’ 등의 상징적 숫자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석 등이 그런 것이고, 하나님의 천지창조 6일을 인류역사 6000년으로 해석하는 알레고리적 해석이 그런 것입니다. 이처럼 잘못된 성서 해석이 사이비 종말론을 양산합니다.

넷째, 성서의 종말론을 탈역사화하기 때문입니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오는 역사의 완성을 초월적이고 탈역사적인 종말 현상으로 이해합니다. 요한계시록 21·22장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우리의 현실 역사와 무관한 초월적인 차원으로만 이해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 말씀은 직접적으로는 죽임을 당하고 고통과 눈물로 지내던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었던 미래의 소망이요, 희망의 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겪었던 체험이나 요한사도가 보았던 그 비전은 당시의 국지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고 인류의 미래를 지시하는 예표였기에 ‘요한계시록’은 후대의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빛과 희망의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불교의 미륵신앙에서 ‘미륵이 하생하여 직접 다스리는 세계가 되면 이 땅은 정토낙원이 된다’는 신앙과도 맥을 같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신앙에서도 그러한 미륵의 세계를 탈역사적인 차원으로 이해하는 타계적 신앙이 있는가 하면 그러한 미륵의 이상을 불자들을 통해서 이 땅 위에서 이룩해야 되는 역사적 과업으로 믿고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현실 참여적 신앙이 있습니다. 미륵상생경에 치우치면 타계적 신앙에 빠지고 미륵하생경에 치우치면 현실참여적 신앙이 됩니다.  

성서를 통전적(統全的)으로 읽는다면 하나님 나라는 초월적 차원과 내재적 차원이 공존하며(눅 17:20∼21), 이미 우리 가운데 왔으나 아직은 완성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마 12:28).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의 현실사회와 역사 속에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구현해야 될 하나님 나라의 내용입니다.

물론 인간의 손으로 지상낙원을 이룰 수 있다고 장담할 때 우리는 마르크시즘적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 없이 홀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며 인간이 할 일을 몽땅 도맡아 처리해 주시는 해결사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물론 이 역사의 핸들을 쥐고 계시지만 언제나 인간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카이로스 시간개념  

성서가 말하는 종말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카이로스’라는 시간개념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헬라어에는 시간 또는 때를 가리키는 단어가 네 가지 있는데 호라(hora), 헤메라(hemera), 크로노스(chronos), 카이로스(kairos)가 그것입니다. 앞의 세 가지는 우리가 흔히 시계와 달력으로 측량할 수 있는 양적이고 수평적인 시간이며 시작과 끝이 있는 직선적인 시간을 말합니다. 그 대표적인 용어가 ‘크로노스’입니다. 그 시간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연결되어 내려오는 직선적인 시간입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이 크로노스적 시간선상에 존재한다는 뜻이 됩니다.  

반면에 카이로스는 질적이고 수직적이며 신적(神的)인 시간입니다. 예를 들자면 예수께서 “내 때가 가까이 왔다”(마 26:18)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눅 1:21)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요 7:6)고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용어가 ‘카이로스’입니다. 이처럼 이때는 시계와 달력으로 측정할 수 없는 질적인 시간 개념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죽음을 맞는 것은 크로노스적 시간선상에서 떨어져 나가 카이로스라는 새로운 시간으로 편입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永生)은 크로노스적 영생이 아니라 카이로스적 영생인 것입니다.

따라서 종말의 시간을 크로노스로 보느냐 카이로스로 보느냐에 따라 종말론의 성격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시간(카이로스)을 우리의 시간개념(크로노스)으로 파악하고 종말의 때를 크로노스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잘못입니다. 예수님은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마 24:36)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크로노스적 시간개념으로 종말의 날짜와 시간을 못 박아 놓는 소위 시한부 종말론이 얼마나 어리석고 비성서적인지 증명됩니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입니다. 그 종말은 하나님 나라와 더불어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으나 아직 완성은 아닙니다. 그 역사의 완성은 이 세상을 부정하고 새로운 은하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몸담아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변화와 발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초석을 놓으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인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 건설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강영선 한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