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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향기/네티즌이 알기쉬운 기독교

25. 구원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 예수를 믿지 않으면 무조건 지옥행인가요?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까?

구원의 개념

가장 흔한 질문이면서도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주제가 바로 구원의 문제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구원과 내세의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신비에 속하는 문제이며, 동시에 인간의 인식능력과 지식범주를 초월하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섣부른 지식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일수 있어서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모든 종교에는 나름대로의 구원관이 있는데 인간이 죄악, 질병, 가난, 고통, 위험으로부터 건짐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공통점을 지닙니다. 인간은 유한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삶의 제약성을 벗어날 수 없으며, 이러한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얻는 것이 모든 종교의 지향점입니다. 나아가서, 언젠가 맞이하게 될 육체의 죽음은 인간의 궁극적 한계상황이지요. 유한자 인간은 신의 은총과 능력에 의지하여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을 초극(超克)할 수 있기를 바라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보편적이고 현세적인 구원의 개념들도 나옵니다. 죄로부터의 구원(고전15:56), 질병으로부터의 해방(마태9:22), 위험과 고통으로부터의 구출(출14:13), 잘못된 가치관으로부터의 해방(누가19:10) 등등. 그러나 구원관에서 다른 종교에 없는 기독교만의 유일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그를 믿는 자들이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요한3:16)이며,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한14:6)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구원의 개념은 하나님나라와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궁극적인 구원이란 예수님과의 생명연대를 통해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뜻하고, 하나님나라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법도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하나님나라는 이 땅의 삶에서부터 시작되지만 육체적 생명 이후에 전개되는 영원한 생명세계에서 더욱 완전하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사람들을 하나님나라로 초대하고 그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기 위한 생애였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뜻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이것은 기독교 신학의 핵심주제이고, 로마서의 중심사상이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내걸었던 개혁운동의 대 명제이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은 로마서에 나오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과 같은 뜻인데, 먼저 “의롭게 된다”는 말부터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의로움(dikaiosis)이란 도덕적·윤리적 차원에서의 ‘올바름’ 또는 ‘정의로움’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즉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도구가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의 요소는 신뢰성과 관계성입니다. 즉 막연한 신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그 하나님에 대한 신뢰, 그리고 그분과의 올바른 관계, 이 두 가지가 기독교 신앙의 필수 요소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다리는 아버지의 이야기’(누가15:11∼32)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공적을 쌓아서가 아니라,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오듯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다.”(히11:6)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화(聖化)가 뒷받침되지 않는 믿음은 공허하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이란 어느 한 순간에 믿음을 고백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쉬운 예를 들어봅시다. 가롯 유다는 구원을 받았을까요?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고동락하는 동안 그는 분명히 믿음을 가지고 구원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 기대와 욕망이 앞선 결과 그는 멸망의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믿음과 구원의 문제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매일매일 순간순간마다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자기부정과 희생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께서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약2:26)이라고 했습니다. 즉 행함이 뒤따라야 비로소 그 믿음이 완전해진다는 것입니다(약2:22). 이와 같이 믿음과 실천, 신앙과 삶은 불가분리의 것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믿음은 이러한 통전적인 믿음을 말하며, 이러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한편,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 명제는 심판의 주체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평가, 사회의 평가, 심지어는 역사의 평가까지도 잘못되고 왜곡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덕망 있고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위선자일 수 있습니다. 한 때 애국자로 추앙받던 사람이 훗날 매국노로 밝혀지는 일이 얼마나 허다합니까? 따라서 인간의 ‘의로움’에 대한 완전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며, 그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좋다’ ‘믿음이 나쁘다’는 평가 자체도 사람이 평가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는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