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이스라엘은 지금도 선민인가?
네티즌을 위한 알기 쉬운 기독교 (46)
이스라엘은 지금도 선민인가?
■ 흔히 이스라엘을 선민이라고 부르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 성경과 찬송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현재의 이스라엘을 동일시해야 합니까.
예수님 오시고 기독교 탄생하면서 ‘선민 이스라엘’ 사명 끝나
이제는 전 세계 그리스도인이 선민
대단히 좋은 질문이며 많은 그리스도인이 갈등을 겪는 문제 중 하나입니다. 저 역시 한때는 이 문제로 고민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 중동 지역에 있는 이스라엘을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동일시할 것인가.”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권 사이에 6일 전쟁이 터졌을 때도 그런 고민을 했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이 아직도 선민인가.” 그래서 성경과 찬송과 교독문에 수없이 나오는 표현들,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에 복주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 등의 표현에 거부감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직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인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와 민족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지역신’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 한때 제가 가졌던 이 같은 의구심과 갈등을 요즘은 수업시간에 학생들의 질문을 통해 다시 확인합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와 민족의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온 세계와 우주를 다스리는 만유의 주님이 될 수 없는 분입니다.
선민사상의 뿌리는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주전 25세기경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는 한 인물을 택해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주전 13세기에 이집트를 탈출, 가나안땅으로 가던 이스라엘 백성과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체결합니다. “이제부터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된다.” 이러한 계약을 맺으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 즉 선민이 됩니다(출 19:5∼6). 하나님이 그 민족을 선택한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인류구원을 위한 복음의 전초기지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그들을 훈련시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고 궁극적으로는 그 민족의 줄기에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를 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삼은 것은 결코 선민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류구원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사명을 망각하고 타 민족을 이방인 취급하고 잘못된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 하나님은 강대국을 통해 그들을 온 세계로 흩으셨습니다.
따라서 선민으로서 그들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끝났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오시고 기독교가 탄생하면서 이미 선민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사명은 끝났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전 세계 그리스도인이 선민이요, 새 이스라엘입니다.
이미 2000년 전부터 기독교는 유대인의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서로부터 몰려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잔치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 8:10∼12).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유대인이 아닌 이방세계 중심으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민족의 사회와 역사의 틀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려고 했다면 초대 기독교는 기독교화 된 로마를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한 적이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하나님 나라의 전령처럼 생각하던 신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당시에 어거스틴 같은 신학자는 기독교화한 로마제국이나 정치적으로 승리한 로마의 그리스도 교회를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이니 ‘예루살렘’이니 하는 명칭들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하나님 나라’처럼 영적 차원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 개념들은 더 이상 현존하는 특정 국가나 도시를 가리키는 이름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온 이스라엘’ 또는 ‘새 예루살렘’이란 이름들이 나옵니다.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 11:26).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계 21:2) 등.
이제는 국경을 초월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물론 그 선민에는 지금의 이스라엘 사람이나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것처럼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로 구성된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계 7:9)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 나라의 상징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고국이요, 한때 선민이었다는 그 사실 때문에 많은 기독교권 나라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스라엘과 주변 나라들 사이에 전쟁이 터져도 기독교 서방세계는 무조건 이스라엘 편을 듭니다.
2001년 9·11테러 사건이 터지고 나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무차별 공격하는 동안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도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때 미국의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무조건 이스라엘 편을 들면서 매일 예루살렘을 위해 기도하는 100만명의 신도와 10만 교회를 확보하자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들은 시편 122편에 나오는 말씀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라는 말씀에 근거를 두고 그런 기도운동을 벌였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보고 예루살렘을 성지로 생각하는 ‘시오니즘’이 우리 그리스도인 가운데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기독교적 사상이 아닙니다.
강영선 한신대 교수